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스틸리코]]와 [[알라리크|알라리크 1세]] === 훈족의 발흥으로 촉발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수많은 이민족들의 이주를 유발했고 이들은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국경 부근에 거주하던 게르만 부족들은 대이동으로 밀려온 부족들에게 밀려 국경 너머의 로마령 속주에 정착했다. 자연스레 정주민인 로마인과 게르만인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지만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부는 각종 부정부패와 내전으로 인해 생긴 극심한 혼란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지방 관리들의 무능함으로 단순한 국경 분쟁이 격렬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게르만족의 봉기가 시작되자 동방의 [[발렌스]] 황제는 진압군을 이끌고 나섰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방군이 대패하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부족들이 제국 영내에 정착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게르만인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곧이어 아직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방 대신 내전과 부패로 약화된 서방 영내로 서서히 움직였다. 서기 2세기의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서방은 일찍부터 곡물 수급량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기반시설과 자원이 풍부한 동방보다 훨씬 암담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395년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붕어한 이후 당시 나이가 어린 호노리우스 황제 대신 [[테오도시우스 1세|선제]]의 사위인 최고 사령관[*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크 밀리타이] '''[[스틸리코]]'''가 국정 전반의 전권을 쥐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생긴 권력의 공백을 훌륭히 채웠으며, 선제의 아들들이 평화롭게 광활한 제국을 온전히 승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여러 쟁쟁한 경쟁자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대제의 두 아들 중 [[호노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을 승계할 수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붕어 시기는 로마 제국에게 불운하게도 게르만인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 시작은 로마 제국의 포에데타리 중 하나로서 [[다키아]] 지방[* 현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었던 동게르만계 서고트족이었다. 395년 서고트족은 '''[[알라리크|알라리크 1세]]'''를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396년 트라키아 속주를 포함한 일대를 약탈하고 파괴한 알라리크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아드리아노플]]을 함락시키며 동로마 제국을 유린했다.('''알라리크 1세의 마케도니아 침공''') 동로마 제국의 동방 군단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에프탈]](백훈)을 견제하기 위해 소아시아에 주로 전개되어 있었고, 서방 군단들은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지휘했지만 사후 스틸리코 휘하로 배속되어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라리크 1세의 침공에 대해 동로마 제국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긴급 요청으로 [[스틸리코]]는 서로마군을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해 알라리크 1세를 포위했지만 당시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피누스의 간계로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의 휘하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송환하도록 요구해 스틸리코는 결정적인 순간 알라리크 1세를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알라리크 1세는 397년 또다시 거병하여 그리스 반도 전역을 유린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서로마군에 의해 또다시 포위 섬멸당할 뻔 했지만 이번에도 알라리크 1세는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스틸리코 대신 동로마 제국과 협상해 [[일리리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틸리코도 손쓸 수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398년 북아프리카에서 90,000명의 병력을 규합한 [[길도]]가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카르타고를 점령하자 서로마 제국에 비상이 걸렸다.('''길도의 반란''') 길도는 로마에 대한 식량 수출을 금지함으로서 제국이 식량난을 겪도록 유도했고, 식량 수급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서로마 제국은 이 조치에 의해 제국 경제의 전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도의 식량 금수 조치로 서로마 제국 내의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스틸리코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식량들을 사들이도록 명령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스틸리코]]는 로마 원로원을 통해 길도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했으며, 길도의 정적인 마스케젤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그로 하여금 길도를 저지하도록 했다. 마스케젤은 로마군과 함께 길도를 제거했고,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이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국 전반이 약화된 상황에서 이민족들의 침공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인 강과 도나우(다뉴브) 강 유역에서 야만족들의 활동이 빈번해지고 있었고, 약해진 제국은 과거와 달리 야만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399년엔 브리타니아 속주에 위기가 닥쳤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돌파한 [[픽트족]]이 잉글랜드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려왔고, 주둔군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속주 전체가 야만족들에게 떨어졌다. 스틸리코가 본토에서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 섬의 잔존 병력과 연합해 픽트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스틸리코가 픽트족과 협상하여 국경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로 합의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픽트족의 브리타니아 침공''') 서기 5세기에 들어선 401년에는 게르만족들 중 고트족의 세력이 크게 일어났는데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1세는 이 시기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알라리크 1세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스틸리코는 이 유래없는 서고트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제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많은 군단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이에 국경 방위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인지라 무리해서라도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군대가 부족했기에 스틸리코는 이민족 용병들과 검투사 그리고 노예들까지 징집하여 30,000명의 병력을 구성해 서고트족의 침공에 대응했다.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스틸리코]]는 폴렌티아에서 알라리크 1세를 크게 격파했다. 이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의 부인과 자식이 사로잡혔고 약탈한 막대한 재화를 손에 넣었다. 스틸리코는 이 재물과 가족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철군을 요구했지만 알라리크 1세는 거부했고, 양군은 베로나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다.('''베로나 전투''') 스틸리코는 알라리크 1세를 재차 격파했고 이 패배로 알라리크 1세는 스틸리코와 협상에 동의하며 판노니아로 철군헀다. 알라리크 1세는 물리쳤지만 제국 국경 전반에서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405년엔 동고트족의 족장 [[라다가이수스]]가 100,000명의 부족민들을 이끌며 이탈리아 북부로 밀고 들어왔다.('''라다가이수스의 이탈리아 침공''')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동고트족에 대응하기 위해 서로마군은 얼마 없는 군대를 재차 집결시켰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군대는 [[회전]]이 가능할 정도의 병력이 없었다.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국경수비대와 이탈리아 방위군은 물론이고, 사루스의 고트족 부대와 울딘의 훈족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라다가이수스의 동고트족 부대는 약탈을 지속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플로렌티아([[피렌체]])를 포위했다. 하지만 플로렌티아는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성병기가 부족한 동고트족의 침공을 연이어 저지했고, 식량같은 물자 보급이 원할하지 않았던 동고트족 부대는 스틸리코 휘하의 서로마군에게 역으로 포위당했다. 라다가이수스는 플로렌티아를 점령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스틸리코는 라다가이수스가 플로렌티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포위당한 플로렌티아에 강을 통해서 물자와 병력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동고트족을 안팎으로 묶어 두었다. 서로마군은 단합되지 못한 동고트족 부족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며 포위를 유지했고, 결국 포위당한 라다가이수스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지만 참패하고 8월 23일에 처형당했다.('''플로렌티아 공방전''') 406년에서 40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서로마 제국에게 대재앙이었다. 국경에 주둔한 군단들이 본국 이탈리아의 방어 전쟁에 동원되면서 약화된 국경수비대는 몰려드는 야만족들을[* 수에비족, 반달족, 알레만니족, 알란족, 고트족] 견디지 못했고, 갈리아 내부로 상당한 수의 게르만 부족들이 진입하게 되었다. 이른바 '''유럽 대륙의 역사를 바꾸게 될 [[게르만족의 대이동|게르만족 대이동]]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무참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서진을 이어나갔고, 동시에 브리타니아의 참칭제인 [[콘스탄티누스 3세]] 또한 갈리아를 침공하면서 당시 서로마 제국의 권력을 쥐고 있었던 [[스틸리코]]의 입지 또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때 스틸리코는 사루스를 보내 반역자 [[콘스탄티누스 3세]]를 상대하게 했고, '''발렌티아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반란군을 격파함으로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세력이 미약한 탓에 추가적인 공세는 할 수 없었다. 서로마 제국이 흔들리자 알라리크 1세는 또다시 군대를 일으켰고('''알라리크 1세의 제2차 이탈리아 침공''') 노리쿰을 점령하면서 금을 내놓지 않으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겠다고 로마 원로원에 엄포를 놓았다. 연이은 악재로 여력이 없는 서로마 제국이었지만 야만족에게 금을 지불하는 것을 치욕이라 여기며 원로원은 알라리크 1세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고트족에게 금을 지불하는데 동의했고 이로 인해 원로원과 [[스틸리코]] 사이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원로원과 어리석은 황제 호노리우스의 음모에 의해 [[스틸리코]]는 올림피우스의 군대에게 사로잡혔고 이내 처형당했다.('''스틸리코의 처형, 408년''') [[파일:external/www.historia.ro/alaric2_0.jpg]] '''알라리크 1세에 의한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410년)|로마 약탈]](410년)''' 408년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스틸리코가 어이없게 숙청된 뒤, 그의 휘하에서 복무했던 서로마군의 중앙 야전군은 그대로 알라리크 1세에게 투항했다. 그 후 408년 10월에 알라리크 1세는 이들 병력과 서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 침공을 개시했다. 알라리크 1세는 서로마군을 격파하고 고도 로마를 포위하면서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서고트족이 정착할 땅을 요구했지만 협상의 의지도 없는 황제와 제대로 된 협상이 될리가 없었다. 알라리크 1세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해 평화롭게 땅을 획득하고자 했지만 호노리우스의 명령을 받은 사루스의 기습과 협상 의지가 전혀 없는 로마 사절단에 분노하여 4차 협상 시도마저 무위로 돌아가게 되면서 410년 서고트족은 '''[[로마 약탈(410년)|로마 약탈]]'''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는 기원전 390년 켈트계 세노네스족에 의한 로마 약탈 이후 무려 800여 년만의 대재앙이었다.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은 지중해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로마 제국도 로마 약탈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동•서로마 제국 모두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알라리크 1세를 저지할 수 없었고, 약탈을 마친 알라리크 1세는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하면서 도시들을 약탈했다. 하지만 알라리크 1세는 남부 원정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병마로 승하했고, 처남인 [[아타울프]]가 서고트족의 왕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암살당했다. 서고트족은 419년 [[테오도리크 1세]]가 호노리우스 황제와 협상하여 [[아키텐]] 지방의 땅을 얻었고, 이곳에 [[서고트 왕국]]을 건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